최유진 | 기자 작성일 2026년 04월 05일
서울 마포구 만리재옛길 굽이진 골목 끝자락, 작은 주택의 정원에는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갈 법한 들풀들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추어탕 위에 올리는 '방아잎'부터 작은 은행나무까지, 이곳은 버려진 식물들이 '구조'돼 새 주인을 기다리는 '식물 유치원'입니다.
식목일을 앞두고 지난달 28일 이곳에서 만난 백수혜씨는 2021년부터 식물을 구조해 무료 분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백씨의 손을 거쳐 새 주인을 찾아간 화분은 어림잡아 1,000개가 넘습니다.
백씨의 활동은 2021년 여름 공덕1구역 인근 주택으로 이사하며 시작됐습니다. 재개발 단지에서 나온 쓰레기 더미 속에서 '초록'을 발견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길로 서울 곳곳 재개발 단지를 돌며 버려진 화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예술을 공부하며 체득한 '버리지 않는 문화'가 기본 철학이 됐습니다. 식물 구조에는 엄격한 원칙이 있는데, '유기' 여부 확인이 최우선입니다. 주인이 있는 식물은 아닌지 시간을 두고 살피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게 확실해지면 구조에 나섭니다.
구조된 식물은 물에 담가두거나 다른 화분에 옮겨 심어 생명을 되찾게 합니다. 이렇게 생기를 회복한 식물들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졸업식'에서 새 주인을 찾습니다.
혼자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느새 작은 움직임은 이곳저곳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백씨는 근처 대안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재개발지를 돌며 식물을 구조한 것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습니다. 최근에는 식물에 관심 있는 대학생들의 연락도 종종 이어지고 있습니다.
백씨는 식물 유치원이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면서도, 버려진 식물을 돌보며 얻는 깨달음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사람은 몇 살에 취업하고, 몇 살에 결혼하고… 이런 부담이 있잖아요. 식물은 3월에 꽃 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9월에 꽃 피는 아이가 있고, 아예 꽃을 안 피우는 아이도 있어요. 무던하면서도 각자의 모습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 기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