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윤 | 기자 작성일 2026년 05월 23일
인공지능(AI)이 노동시장을 뒤흔들 것이라는 일반적 우려와 달리, 국내 주요 직업 대부분은 향후 10년간 일자리 규모가 현재 수준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늘어날 것이라는 정부 산하 연구기관의 분석이 나왔다. AI가 일부 정형 업무를 빠르게 흡수하더라도, 고령화와 디지털 전환, K콘텐츠 확산 같은 구조적 흐름이 새로운 일자리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진단이다.
보고서 핵심 결과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 18일 공개한 '2025~2035 정성적 일자리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분석 대상 182개 주요 직업 가운데 114개(62.6%)는 2035년까지 일자리 규모가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됐다. 보고서에서 일자리가 단순히 '감소'할 것으로 평가된 직업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다소 감소'는 12개(6.6%), '증가'는 9개(4.9%), '다소 증가'는 47개(25.8%)로 집계됐다. 현재 수준 유지와 '증가·다소 증가'를 합산하면 170개 직업, 약 93.4%가 유지 또는 확대 범주에 들어간다. AI가 광범위한 직업 소멸을 야기할 것이라는 일부 전망과는 상당히 다른 결과다.
증가가 예상되는 직업군
보고서가 일자리 증가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한 분야는 보건·의료·돌봄, 데이터 분석, 디지털금융, 경영기획·마케팅, 콘텐츠·관광 등이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돌봄 종사자 같은 전통적 인적 서비스 직업과,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디지털 금융 전문가 같은 신규 직업이 함께 성장할 것으로 분석됐다.
성장 동력으로는 고령화, 예방·재활·정신건강 수요의 확대, 산업 전반의 디지털 전환, K콘텐츠의 글로벌 확산이 꼽혔다. 사람의 직접적 손길이 필요한 영역과, AI가 도입돼도 사람의 판단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영역이 동시에 강세를 보이는 구조다.
보건·의료·돌봄의 구조적 확장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한국은 2025년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의료기관 이용 빈도와 만성질환 관리, 장기요양 수요가 동시에 늘어나는 가운데 의료·돌봄 인력에 대한 사회적 필요는 향후 10년간 계속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보고서는 이러한 인구 구조 변화를 의료·돌봄 직군 전망의 핵심 변수로 제시했다.
데이터·디지털금융 직업 부상
데이터 분석, 디지털금융, AI 기획 등 새로운 직무는 산업 디지털 전환과 맞물려 빠르게 성장하는 직군으로 평가됐다. 기업들이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과 AI 도입에 투자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관련 직군의 인력 수요는 신규 채용과 기존 직무의 재교육이라는 두 갈래로 확대되는 모습이다.
다소 감소가 우려되는 직업군
반면 보고서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업무가 중심인 직무에서는 일자리 수요가 다소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대표적으로 출납 창구 사무원, 은행 사무원, 증권 사무원 등 정형화된 사무직과, 학령인구 감소의 영향을 받는 아동·청소년 관련 직무가 거론됐다. 비대면·셀프서비스 확산과 연결된 접객 업무 역시 다소 감소 가능성이 있는 직업군으로 분류됐다.
이미지 생성 AI의 확산으로 디자인·편집 보조직 역시 일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다만 보고서는 이러한 영역에서도 '소멸'이 아니라 '재구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직무 자체가 사라지기보다는 일부 업무가 자동화되고 사람은 기획·검수·고도화 역할로 이동할 가능성을 강조했다.
글로벌 흐름과 비교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Future of Jobs 2025 보고서는 2030년까지 전 세계 일자리가 22% 수준의 변동을 겪을 것으로 내다봤다. 신규 일자리 1억 7,000만 개가 만들어지고 9,200만 개가 사라져 순증 7,800만 개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으며, AI와 정보처리 기술이 1,100만 개를 새로 만드는 동시에 900만 개를 대체할 것으로 분석했다.
WEF가 빠른 성장이 예상되는 직업으로 꼽은 빅데이터 전문가, 핀테크 엔지니어, AI·머신러닝 전문가 등은 한국고용정보원이 제시한 데이터·디지털금융·콘텐츠 분야 확대 전망과 일치한다. 반대로 출납원, 행정 보조, 그래픽 디자이너 등 빠른 감소 직업도 한국 보고서와 유사하게 나타났다. 한국 노동시장이 글로벌 흐름과 큰 틀에서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어떤 기관인가
한국고용정보원은 고용노동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으로, 고용·직업·진로 정보의 수집과 분석, 워크넷·HRD-Net·고용보험 등 8대 고용정보시스템 운영, 인력수급 전망과 청년정책 평가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이번 보고서는 경영·사무·금융·보험직, 보건·의료직, 예술·디자인·방송·스포츠직, 미용·여행·숙박·음식·경비·청소직 등 4개 직군 205개 직업 가운데 분석 가능한 182개를 대상으로 평가했다.
스타트업·기업의 시사점
스타트업과 기업 관점에서 이번 보고서의 핵심 시사점은 '일자리 소멸'이 아니라 '업무 재구성'에 가깝다. AI가 반복 업무를 줄이는 동시에 의료·돌봄, 데이터, 콘텐츠, 금융, 관광 등 새로운 수요를 키운다면, 채용과 제품 전략 역시 직무 대체가 아니라 직무 보완과 생산성 향상에 맞춰져야 한다.
AI를 도입하는 기업에는 직무별 자동화 가능성과 사람의 판단이 필요한 영역을 정교하게 구분하는 설계 역량이 더 중요해질 전망이다. 동일한 AI 도구를 도입하더라도 직무 흐름을 어떻게 재설계하느냐에 따라 생산성과 고용 안정이 함께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이번 전망은, AI 시대 노동시장 변화가 단선적 위기가 아니라 산업별·직무별로 다른 속도와 방향을 가진 복합적 전환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