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현 | 기자 2026년 04월 09일
정수기를 비롯한 가정용 전자제품을 만들며 33년간 흑자를 이어온 중견기업인 청호나이스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수천억원에 이르는 상속세를 내야 하는 대주주 일가가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해 해외 사모펀드(PEF)에 회사를 팔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
이전에도 락앤락이나 한샘, 쓰리세븐 같은 탄탄한 중견기업들도 상속과정에서의 막대한 세금 부담에 회사를 넘겼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승계 부담으로 제3자 매각을 고려하는 중소·중견기업이 국내에만 약 21만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에 이르고, 대주주라는 이유만으로 보유한 주식에 20% 할증까지 부담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상속 시 내야 하는 세금 부담은 최고 60%에 이른다. 이는 일본(55%), 프랑스(45%), 미국·영국(40%) 등 주요 선진국을 크게 웃도는 것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특히 최근 주가 상승으로 잠재적인 상속세 부담은 더 커졌고, 세 차례에 걸친 상법 개정으로 경영권 방어에는 어려움이 커졌으니 기업들은 이래저래 어려운 상황이다.
삼성그룹 오너 일가가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유산에 대한 12조원 규모의 상속세를 완납하기 위해 5년간 사투를 벌였던 일만 봐도, 중소중견기업들에게 상속세가 얼마나 큰 부담일지 짐작할 수 있다.
정부가 지난해 최고세율을 40%로 낮추는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부자 감세' 프레임에 갇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상속세 산정 방식도 마찬가지다. 현행 상속세는 피상속인의 상속재산 전체를 합산한 후 세율을 적용하는 유산세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는 OECD 국가들 중 유일하다. 각자 상속받은 재산만큼만 세율을 적용하는 유산취득세를 대부분 국가들이 적용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입법이 불발됐다.
경제규모도 커지고 자산가치도 뛰었지만 상속세는 2000년 이후 26년째 제자리다. 상속세 제도 자체를 시대에 맞게 바꾸지 못하면서, 가업상속에 따른 공제만 계속 늘리다 보니 주차장이나 주유소, 베이커리 카페 등 상속세를 편법적으로 줄일 수 있는 허점만 양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젠 상속세 자체를 시대상에 맞게 재설계해야 할 때다.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와 유산취득세로의 전환 등 정부가 입법을 시도했던 부분들을 최우선적으로 법 개정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대주주 주식에 붙는 20% 할증도 폐지해야 한다. 대주주와 일반주주 간 이해관계를 일치시켜 형평성도 높이고 기업 가치도 끌어올릴 수 있다.
상속세는 기업을 개인의 소유물로 보고, 그 소유자가 사망할 때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기업은 단순히 개인 자산이 아니라,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다. 기업이 지속적으로 혁신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상속세를 재설계하는 일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