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소 | 기자 작성일 2026년 04월 12일

잠든 포인트 자산을 활성화하는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한민국에는 이미 '숨겨진 화폐'가 존재한다. 신용카드를 쓰면 포인트가 쌓이고, 비행기를 타면 마일리지가 적립되며, 통신사와 유통사는 멤버십 혜택을 제공한다. 확인 가능한 수치만 보더라도 카드사 연간 포인트 적립액은 약 6조원(금융감독원, 2025), 대한항공·아시아나 합산 마일리지 이연수익은 약 3조 6000억원(각 사 반기보고서, 2025)에 달한다. 통신·유통·간편결제 포인트까지 포함하면 전체 포인트 경제 규모는 수십조원대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 돈이 '돌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드사 포인트는 2021~2024년 4년간 총 3160억원, 연평균 약 800억원이 소멸됐다(금융감독원, 2025). 유통 분야 포인트도 연간 약 132억원이 사라진다(한국소비자원·공정거래위원회, 2024). 확인된 수치만으로도 매년 약 1000억원이 소비자의 손을 떠나 기업의 이익으로 전환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50개 포인트 중 62%가 상법상 소멸시효(5년)보다 짧은 1~3년의 유효기간을 설정했고, 92%는 소멸 전 사전고지 절차가 미흡했다.
이 구조가 반복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포인트는 기업 생태계 안에 갇혀 있다. 항공 마일리지는 항공사 중심으로만, 유통 포인트는 해당 그룹 안에서만 쓰인다. 둘째, 회계 구조가 소멸을 장려한다. 포인트는 발행 시 계약부채로 잡히지만, 소멸되는 순간 매출로 전환된다. 셋째, 교환 인프라가 없다. 포인트 간 교환에는 기업 간 계약과 IT 연동이 필요하고, 소상공인은 사실상 참여가 불가능하다.
해법은 네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소멸 부담금 제도는 소멸된 포인트의 일정 비율을 소비자보호기금으로 납부하게 해 기업의 소멸 유도 인센티브를 없앤다. 세제 인센티브는 포인트 교환 시스템 구축과 제휴 확대에 법인세 공제를 적용해 기업의 참여를 이끈다. 공공 교환 플랫폼은 제로페이 인프라와 마이데이터를 연계해 국민이 하나의 앱에서 모든 포인트를 조회하고 소멸 알림을 받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유효기간 법제화와 자동환급제는 유효기간을 최소 5년으로 법제화하고, 소멸 직전 포인트를 자동 현금화해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이다.
영국 Nectar 프로그램은 500개 이상의 브랜드가 참여하는 연합 포인트 시스템으로, 소비자가 단일 앱에서 적립과 사용을 통합 관리하는 모델을 이미 구현했다. 호주는 소비자 데이터 권리(CDR)를 금융·에너지 분야에 도입해 소비자가 자신의 데이터를 직접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결제 인프라와 마이데이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소멸 부담금으로 기업의 행동을 바꾸고, 세제 인센티브로 참여를 확대하며, 공공 플랫폼으로 구조를 연결하면 기업은 고객 충성도를 얻고, 소비자는 실질 소득이 늘어나며, 국가는 재정 지출 없이 민간 소비 활성화를 이끌 수 있다.
이광재 (전 국회사무총장)